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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성전에서의 아이

               열두 살, 말씀이 깨어나던 날

📖 대표본문 : 누가복음 2:41–52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1)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2)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함께 읽기
사무엘상 3:1–10 (소년 사무엘의 부르심)
말라기 3:1–4 (주의 길을 준비하는 예언)

 

예수님의 첫 말씀은 언제였을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첫 말씀을 산상수훈, 가나의 혼인잔치, 또는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에서 찾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가 대부분 예수님의 공생애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나이 열두 살.
예루살렘 성전.
부모를 떠나 홀로 남아 계셨던 한 소년.
그곳에서 예수님은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드러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기록한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그때의 유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유대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아내와 아들들까지 죽일 만큼 잔혹한 왕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베들레헴과 그 주변의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도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유대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정치적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대부분은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보다 로마를 무너뜨릴 정치적 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헤롯에 의해 웅장하게 확장되었지만, 그 안에서는 형식적인 신앙과 종교 권력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예수님은 자라나셨습니다.

 

왜 유월절이었을까?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많은 유대인들은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사렛에서도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긴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약 144km.
노인과 어린아이를 동반한 행렬은 보통 일주일 정도가 걸리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님을 데리고 이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왜 열두 살이었을까?

 

성경은 예수님의 나이를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누가복음 2:42)

성경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나이를 열두 살이라고 밝힙니다.
왜였을까요?
단순히 나이를 알려주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뜻이 있었을까요?
유대 사회에서 열두 살은 성년이 되기 전 마지막 준비의 시간이었습니다.
아직 완전한 성인은 아니지만, 이제 율법을 배우고 책임 있는 신앙인으로 서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12는 매우 중요한 숫자로 반복됩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소 안에는 열두 개의 진설병이 놓였습니다.
그 떡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했습니다.
 
대제사장의 흉패에는 열두 보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나타냈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새로운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열두 살 예수님의 사건과 열두 제자를 직접 연결하여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따라가다 보면,
12라는 숫자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나라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어린 시절 가운데 바로 이 열두 살의 사건만을 성경에 남기셨을까요?
혹시 이 장면은, 구약의 열두 지파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 훗날 열두 제자를 세우시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길을 여실 것을 미리 비추는 장면은 아니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열두 살의 예수님은 아직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사라진 아이

 

유월절 절기가 끝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나사렛 사람들과 친척들의 행렬 속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당시 순례길은 혼자 이동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친척, 이웃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함께 걸었습니다.
아이들은 또래들과 어울려 걷기도 하고, 친척들 사이를 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행 가운데 계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룻길을 간 뒤에야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위험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날들,
헤롯의 칼날을 피해 지켜야 했던 아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아들.
그 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친척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찾고 또 찾았지만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성전에서 듣고, 묻고, 대답하시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 계셨습니다.
율법교사들 가운데 앉아 계셨습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누가복음 2:46)
예수님은 단지 말하고만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묻고 계셨습니다.
또 대답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47)
율법을 평생 연구한 사람들이 열두 살 소년의 지혜와 대답 앞에서 놀라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똑똑한 아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것은 한 소년의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처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그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교사들도,
성전에 있던 사람들도,
심지어 요셉과 마리아도 그 말씀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첫 말씀

 
마리아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누가복음 2:48)
그 말에는 책망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놀람,
두려움,
걱정,
그리고 어머니의 깊은 근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누가복음 2:49)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처음 읽으면 이 말씀은 매우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계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라 불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 집”이라는 표현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아버지는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단순히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자신의 참된 소속을 드러내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해야 할 아들이셨지만,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아들이셨습니다.

 

정말 “아버지의 집”일까?

 

개역개정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성전이라는 장소와 연결해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조금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의 핵심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ἐν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
(en tois tou patros mou)

직역하면,

“내 아버지께 속한 것들 가운데”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집”을 뜻하는 헬라어 οἶκος가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일”을 뜻하는 단어도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들도 이 구절을 다르게 번역합니다.
KJV와 NKJV는

“my Father’s business”
“내 아버지의 일”

이라고 번역합니다.
 
반면 ESV, NASB, NIV 등은

“my Father’s house”
“내 아버지의 집”

으로 번역합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요?
 
헬라어 원문은 “집”이나 “일” 중 하나를 직접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 속한 것들”이라는 넓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는 문맥을 따라 뜻을 보충해야 합니다.
성전이라는 장소를 강조하면 “아버지의 집”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과 정체성을 강조하면 “아버지의 일”이 됩니다.
둘은 서로 반대되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계신 이유는 단순히 장소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사명 가운데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일로

 

예수님의 첫 말씀은 짧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분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삶의 중심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이라는 표현은 성전이라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을 따라가면 그 의미는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단지 성전에 머물러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속한 것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사명.
그 모든 것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을 여는 첫 문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분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누가복음 2:51)

예수님은 다시 나사렛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후 약 18년의 시간을 거의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아셨지만,
앞서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말씀은 아버지의 사명을 드러내셨고,
그 다음 행동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말씀과 순종이 함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움직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열두 살에 이미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지만,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열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내 관심은 내 계획에 있습니까,
아니면 아버지께 속한 것들 가운데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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